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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위안화 남의 일 아니다···한국도 장기 대안 필요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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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여환 조회1,249회 댓글0건 작성일21-04-04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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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장 앞서···우리도 인근 국가 역외 결제 검토 필요[서울경제]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로 불리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가운데, 한국도 인근 국가의 역외결제를 검토하는 등 장기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CBDC는 전자적 형태로 디지털 지갑을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 비슷하지만 중앙은행이 발행해 가격이 안정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3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글로벌 동향 및 전망’보고서에서 “CBDC 상용화에는 수년이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 국내 통화정책과 외환시장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커 지속적인 모니터링은 물론 인근 국가 간 역외결제 검토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전경련 보고서는 "인근국 및 주요 무역파트너와 무역·투자 결제 개선을 위한 CBDC 브릿지 추진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현금 발권과 유통 비용을 줄이고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늘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CBDC 도입 논의는 페이스북의 리브라 프로젝트 등 민간의 디지털화폐 출시 움직임이 가시화하자 최근 주요국을 중심으로 활발해지고 있다.코로나19 등으로 현금 사용이 급감한 것도 논의를 가속했다.매켄지 글로벌 페이먼트 리포트에 따르면 중국과 미국, 한국 등의 현금 사용 비중은 10년 새 절반가량 줄었다. 중국의 총거래량 대비 현금 사용 비율이 2010년 99%에서 지난해 41%까지 떨어진 것이 대표적이다.특히 중국은 CBDC 도입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자료: 전경련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글로벌 동향 및 전망 보고서중국은 2014년부터 디지털 위안화(DCEP) 도입을 검토했고, 지난해 4월에는 가상환경을 조성해 CBDC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파일럿 테스트도 했다.이에 중국이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내년 2월에 맞춰 세계 최초로 CBDC를 발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중국은 기축통화로서의 위안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디지털 위안화 역외결제 활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최근 홍콩, 태국 등과 CBDC 국가 간 실시간 지급결제서비스를 검토한 것도 이 때문이다.미국도 최근 코로나19 경기부양 지급결제 수단으로 CBDC가 부상하자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2023년 디지털 달러 공개를 예상하기도 했다.한국은행도 CBDC 발행 리스크와 필요성을 검토하고, 연내 파일럿 테스트를 시행할 예정이다./곽윤아 기자 ori@sedaily.com▶ 상위 1% 투자자 픽! [주식 초고수는 지금]▶ 지피지기 대륙 투자 공략법[니하오 중국증시]▶ 네이버 채널에서 '서울경제' 구독해주세요!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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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깨는 사람들' '오르낭의 장례식'이라는 작품이다. '돌 깨는 사람들'은 제목 그대로 돌을 깨는 노동자를 그린 작품이다. 채석장에서 해진 옷을 입은 노동자 한 명이 무릎 꿇고 망치로 돌을 깬다. 그 옆에선 소년이 힘겹게 돌을 나르는 중이다. 누추한 노동자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고된 노동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았다. 사진 찍듯 현실을 치밀하게 기록했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등장인물이 40명이 넘는다. 가로 길이만 7m에 가까운 대작이다. 시골마을 장례식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은 도발적이다. 서양화에서 죽음은 단골 소재였다. 예수의 죽음을 그린 그림은 얼마나 많은가. 서양화 속에서 죽음은 신성화됐다. 그런데 쿠르베가 묘사한 죽음의 장면은 푸석푸석하다. 이 그림에서 관객은 누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시신이 담긴 관은 이미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다. 그저 한 죽음이 있고, 이 죽음 곁에 살아있는 사람 수십 명이 모여 있을 뿐이다. 슬픈 얼굴로 고인을 애도하는 사람도 몇 명 없다. 대부분 사무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장례식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듯한 한 얼굴도 있다. "보통 사람의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미술을 향유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기득권이었다. 그들은 하층계급을 그린 쿠르베 작품 앞에서 당황했다. 시골 마을 평범한 장례식 풍경화 앞에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는 밑바닥 삶이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들은 쿠르베에게 "당신의 그림은 예술이 아니다"라며 공격했다. 쿠르베는 의기양양했다. 추한 그림을 멈추고 종교화나 그리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 쿠르베가 남긴 이 말은 화가의 철학을 요약한다. 그는 자신의 망막에 비친 현실만 그리기로 했다. 쿠르베는 힘겨운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봤다. 이것이 현실이고, 그것을 그렸다.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쿠르베 그림에 등장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물을 소재로 삼는 것만으로도 쿠르베는 이단아가 됐다. 쿠르베 스스로도 자신이 규칙을 깨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오르낭의 장례식`(1849~1850) / 오르세 미술관 소장 ◆사실주의 화풍이 탄생했다1855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쿠르베는 이 잔치에 그림을 출품했다. 주최 측은 쿠르베가 보낸 그림 중 몇 점을 거부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예술, 과학, 기술을 뽐내는 경연장이었다. 국력 과시가 목적인 무대에 쿠르베 그림은 맞지 않았다. 누추한 노동자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어떻게 프랑스의 국력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거절당한 쿠르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거대한 도발을 실행했다. 박람회장 바로 앞에 보란 듯이 개인 전시장을 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 수십 점을 걸었다. 쿠르베는 이 전시에서 처음으로 '사실주의(Realism)'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여전히 기득권에게 쿠르베는 성가신 존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추종자도 늘었다. 쿠르베는 동시대에 살아가는 화가들 가운데 자신만큼 민중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는 없다고 확신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향해 오히려 크게 비웃었다. 그는 혁명가가 됐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혁명에 가담했다. 1871년 3월 프랑스에는 다시 한번 혁명이 일어났다. 쿠르베 그림에 등장하는 노동자 계급이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파리에 자치정부를 세웠다.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이 세운 정부가 탄생했다. 이 정부를 파리코뮌이라고 부른다. 쿠르베 역시 혁명에 가담했고, 파리코뮌에서 중책을 맡았다. 쿠르베는 문화와 관련한 정책 전권을 손에 쥐었다. 박물관 관리와 살롱전 개최 권한까지 얻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잠깐이었다. 권력은 무섭다. 선량한 사람도 권력을 쥐면 변하기 쉽다. 파리코뮌 지도자들은 과격해졌다. 프랑스대혁명 직후 공화주의자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눴듯이 파리코뮌 안의 공기에도 사나운 기운이 가득했다. 결국 쿠르베는 직함을 내려놓고 파리코뮌을 떠났다. 이후 혁명 세력은 나폴레옹 황제를 기념하는 기념물을 파괴했다. 파리코뮌은 단명했다. 탄생 두 달 만에 정부군에게 무참히 진압당했다. 실패한 혁명에는 막대한 비용 청구서가 따라온다. 파리코뮌이 붕괴된 후 쿠르베는 체포당했다. 나폴레옹 기념 건축물을 붕괴하는 데 일조한 혐의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는 막대한 벌금형도 맞았다. 쿠르베는 빈털터리가 됐다. `송어`(1872) / 취리히 미술관 소장 ◆쿠르베가 지킨 원칙, 인상주의를 꽃피웠다1872년 쿠르베는 '송어'라는 그림을 그렸다. 낚싯바늘에 꿰어져 뭍으로 나온 송어의 눈동자는 절박하다. 쿠르베는 절벽으로 몰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그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여전히 이 세상의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쿠르베는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서 1873년 스위스로 망명을 갔다. "나는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라고 말하던 화가는 고국을 떠난 지 4년 후 타국에서 객사했다.쿠르베가 고수한 원칙은 그가 떠나고도 살아남았다. 쿠르베가 만국박람회 옆에 전시회를 차렸을 때, 이곳을 찾은 젊은 화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쿠르베가 묘사한 진실 앞에서 전율했다. 신화, 종교, 귀족처럼 고귀한 것들만 그리는 시대가 저물었음을 확신했다. 그들은 '나도 이 화가처럼 지금 이 시대를 그리겠다'라고 다짐했다. 이들은 훗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고 미술사를 바꿨다.미국인 작가 필립 로스의 작품 '에브리맨'은 제목처럼 '모든 사람'에 관한 소설이다. 특별할 것 없고, 흔해 빠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 늙고 병들어 언젠가는 소멸하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건조한 문장으로 묘사한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쿠르베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가는 수많은 사람을 위한 화가였다.[조성준 기자]▶ '경제 1위' 매일경제, 네이버에서 구독하세요▶ 이 제품은 '이렇게 만들죠' 영상으로 만나요▶ 부동산의 모든것 '매부리TV'가 펼칩니다[ⓒ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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